일본이 낳은 에도시대 최고의 화백, 오가타 고린
예술에 일생을 전념한 에도시대 화가 오가타 고린(尾形光琳)은 장식성이 두드러진 그림을 그린 "장식화 파의 대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직물 도안에도 재능을 발휘해 추상적 장식 도안에 대한 세련된 감각과 자연에 관한 면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 그의 걸작 '제비붓꽃 병풍'은 오가타 고린이 예술가로서 인정받아 활발히 활동한 무렵에 그린 작품으로 2004년 11월 새롭게 발행된 5,000엔 지폐 뒷면에 실려 있다. 유럽의 인상파, 현대 일본화 및 디자인에도 큰 영향을 끼친 오가타 고린의 일생과 일본 국보 '제비붓꽃 병풍'을 소개한다.
예술에 조예가 깊던 오카타 고린의 집안
오가타 고린(尾形光琳, 1658 ~1716. 7. 20)의 본명은 오가타 고레토미(尾形惟富), 오가타 이치노조(尾形市之丞)라고 한다. 고린은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의 통치자들을 섬긴 무사의 자손이었고, 유명한 서예가·도공(刀工)인 혼아미 고에쓰(本阿光悅)의 친척이었다. 고린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가리가네야(雁金屋)'라는 포목점을 운영했는데 일본 전통 의상인 기모노용 직물을 취급하는 가게였다. 이 당시 수도였던 교토에서 가장 유력한 귀부인들을 단골로 삼아 번창했다. 또한 그의 가족들은 예술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고린의 할아버지인 소하쿠(宗伯)는 혼아미 고에쓰가 교토 교외에 세운 예술촌에서 말년을 보냈고, 아버지인 소켄(宗謙)은 가무극 '노(能)'의 애호가였을 뿐만 아니라 고에쓰 유파에 속하는 뛰어난 서예가이기도 했다. 예술가를 배출한 집안답게 오가타 고린과 그의 동생, 겐잔 역시 예술에 조예가 깊던 집안의 영향으로 훗날 예술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노(能)는 무로마치시대에 간아미(観阿弥), 세아미(世阿弥) 부자가 집대성한 가무극이다. 귀신과 신, 여성 등 모든 역할을 남성이 연기했기 때문에 노 특유의 일본 전통 예능 가면과 가부키가 발달했다.
사치스러운 생활로 멀리했던 예술가의 삶
고린은 화려하고 고아한 환경에서 자라며 30세에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으로 경제적 어려움 없이 유복한 생활을 누렸다. 자유분방한 삶을 살던 젊은 시절의 고린은 상당히 많은 재산을 쾌락과 유흥에 쓰며 40세가 될 때까지 독신으로 살다가 1679년에야 결혼했다. 고린의 호사롭다 못해 방탕한 생활은 교토 아라시야마(嵐山)에서 연 사치스러운 야유회에서 엿볼 수 있다. 고린과 그의 친구들이 참가한 야유회에서 저마다 가져온 훌륭한 음식을 자랑스럽게 내보였는데, 고린은 음식을 금으로 장식한 대나무 잎에 싸와 환락의 극치를 이루는 잔치를 했다. 식사가 끝나자 고린은 대나무 잎을 강물에 던졌는데, 이 일로 인해 그는 한동안 교토에서 추방되었다. 평민의 금과 은 사용을 금지한 법률에 어긋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사치스러운 생활로 고린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해 생계를 위해 예술에 종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오랫동안 그림을 배웠는데, 처음에는 아버지한테 배운 것으로 여겨지며 나중에는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가노(狩野)화 파'의 일원인 야마모토 소켄(山本素軒)의 지도를 받았다. 소켄은 중국식 수묵화뿐만 아니라 일본 고유의 주제와 다채로운 장식 화풍을 채택한 전통적 '도사(土佐)화 파'의 그림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그래서 제자인 고린에게 두 가지 양식의 그림을 모두 가르쳐주었다. 그 밖에 가노 야스노부(狩野康信)의 작품과 소타쓰의 작품도 고린의 초기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이 두 사람은 17세기 초의 가장 뛰어난 장식화가였다. 고린의 초기 작품으로 확인된 그림은 거의 없고, 이 시기의 그림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작품들은 전통적 가노 화파의 양식에 따라 먹물로 그려진 것으로 본다.
예술가로서 인정받은 홋쿄 고린
고린이 예술적 원숙기에 접어든 것은 그가 직업 화가로 완전히 기반을 잡은 1697년이었다. 1701년에 그는 43세의 나이로 '홋쿄(法橋)' 칭호를 받았는데, 이는 그가 노련한 화가였음을 보여준다. 그후 그의 작품에는 홋쿄 고린이라는 서명이 사실상 빠짐없이 들어가 있다. 그의 그림에는 연대가 적혀 있는 것이 거의 없으므로 작품의 제작순서를 결정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중요한 작품은 모두 1697년 이후 20년 동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697~1703년은 그가 예술가로 인정받고 그의 예술이 형성되기 시작한 교토 시대이며, 1704~1710년은 그가 에도에서 살았던 시절이고, 1711~1716년은 그의 예술이 절정에 이른 시기이다.
고린의 걸작으로 여겨지는 대표작에는 추초도(秋草図), 제비붓꽃 병풍 (燕子花図屛風), 파도도 병풍(波濤図屛風), 풍신뇌신도 병풍(風神雷神図屛風)과 홍백매도병풍(紅白梅図屛風) 등이 있다. 작품마다 소장하는 박물관이 달라서 한 자리에서 볼 수는 없지만, 몇 년에 한 번씩 우에노에 있는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일본 국보와 중요문화재 소장품 전시 때 고린의 일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오가타 고린의 최고의 걸작 “제비붓꽃 병풍”
네즈 미술관 전시회 중에서 제일 인기 많은 국보가 오가타 고린(尾形光琳)의 “제비붓꽃 병풍”이다. 오가타 고린은 에도시대 중기에 활약한 화가로 일본 회화 계에 큰 영향을 준 “린파”의 시조이다. 병풍화·칠기·직물 도안에 재능을 발휘해 추상적 장식 도안에 대한 세련된 감각과 자연에 관한 면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 그의 걸작인 '제비붓꽃 병풍'은 오가타 고린이 예술가로서 인정받아 활발히 활동한 시기(1701년도)의 작품으로 5,000엔 지폐의 모티프가 될 정도로 유명하다. 고린의 생가는 포목상이었기 때문에 율동적으로 반복 배치된 제비붓꽃이 기모노의 디자인과도 공통하는 부분이 많다.
일본 정부에서 국보로 지정하여 매년 4월~5월 네즈 미술관 정원에 제비붓꽃이 피는 개화 시기에 맞춰 오가타 고린 특별전시로 “제비붓꽃 병풍”을 전시해 많은 방문객이 관람하러 미술관을 찾는다. 고린의 단조롭고도 장식적인 도안 감각과 자연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감수성이 가장 잘 나타나 있어 이 시기의 최고의 걸작이라 여긴다. 59세의 나이에 작고(作故)한 고린은 활동 당시 제자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은 19세기 초반에 활동한 사카이 호이쓰(酒井抱一)이다. 고린은 다채로운 병풍, 장식 도안으로 유명하지만, 뛰어난 칠기 공예가이기도 하며 이 분야의 기술자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동생 오가타 겐잔(尾形乾山)의 도자기에 그려준 그림 장식이 유명하다. 네즈 미술관의 특별 전시회에서 일본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두 형제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니 전시 기간 내에 도쿄를 방문할 예정이라면 감상해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