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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3대 명성 (お城): 나고야 성, 오사카 성, 구마모토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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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부한 역사와 문화 유산이 살아 숨쉬는 일본의 3대 명성으로 뽑히는 나고야 성, 오사카 성 그리고 구마모토 성을 알아보자. 일본에 많은 성들이 생겨나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일본의 역사와 더불어 각 성이 가지는 특징을 알려드릴게요.

일본 성(城)의 역사

일본의 중세시대에는 돌 벽의 방비를 두껍게 강화하였고, 한으로 애워싸며 군림과 방어를 하며 지배세력이던 사무라이 계층의 거주지인 성을(1871년까지 일본에서는 수백이 넘는 봉토가 있었다), 넓은 해자로 둘러싸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대부분의 일본 성들은 나라가 끊임없이 잔인한 전쟁을 하던 시기인 15세기와 16세기에 지어졌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도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은 무사들이 1467년-1615년 무렵, 전국시대로 알려진 일본의 중세시대에 지어진 일본의 수많은 성들과 연합한다. 이러한 계속되는 전락 속에서 방어를 위해 두껍고 튼튼한 성벽이 더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나고야 성

나고야 성(일본어: 名古屋城, なごやじょう)은 오와리 국 아이치 군 나고야에 있는 성이다.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 17대의 거성으로 긴코조(金鯱城: 금 샤치호코 성), 긴조(金城: 금 성)으로도 불린다. 성이 있는 곳은 현재 아이치 현 나고야 시 나카 구·기타 구의 메이조 공원에 있다. 이세 민요에도《이세는 나루를 품고, 나루는 이세를 품고, 오와리 나고야는 성을 품네》라는 대목이 나온다. 천수에 놓인 긴샤치는 성뿐만 아니라 나고야의 상징이다. 이마가와 가문과 오다 가문의 나고야 성(那古野城)은 지금의 나고야 성의 니노마루에 위치한다. 옛 나고야 성은 오다 노부나가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센고쿠 시대
16세기 초기에 이마가와 우지치카가 오와리 진출을 위해 축성한 야나기노마루가 나고야 성의 기원이다. 이 성은 지금의 나고야 성 니노마루에 있었다고 추측된다. 1532년 오다 노부히데가 이마가와 우지토요로부터 탈취해 나고야 성(那古野城)이라고 개명한다.

에도 시대
기요스 성은 오랫동안 오와리의 중심이었지만, 1600년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정치정세의 대응과 수해에 취약한 기요스의 지형의 문제등의 이유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홉 번째 아들 도쿠가와 요시나오의 거성으로써, 1609년 나고야 성 축성을 결정한다. 1610년 서국의 여러 다이묘에 데쓰다이부신으로 성을 짓기 시작한다.

그후 메이지 유신을 맞이할 때까지 나고야 성은 도쿠가와 고산케(御三家)의 필두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이 거주한 성으로서 번영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945년 5월 나고야 공습시 대천수각, 소천수각, 혼마루어전(本丸御殿)을 비롯해 건물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다행히도 소실을 면한 3개의 야구라(서북, 서남, 동남의 망루), 3개의 문(오모테니노문(表之二門), 구 니노마루 히가시 니노문(舊二之丸東二之門), 니노마루 오테 니노문(二之丸大手二之門)), 혼마루어전 장벽화의 대부분은 중요문화재로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전체 기사 읽기: www.nagoyajo.city.nagoya.jp (한국어)

나고야 성에 있는 주요문화재

-도난스미야구라 (망루)
혼마루의 남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지붕이 2중이며 내부가 3층인 망루. 옛날에는 무구를 보관해 두고 있었다고 한다.

-세이호쿠스미야구라 (망루)
지붕이 3중이며 내부가 3층 구조인 망루. 다른 건물의 오래된 재료를 전용해서 건축되었으며, 외부 북면과 서면에 삼각형 박공을 만들고 '이시오토시 (돌을 떨어뜨리는 곳)'을 갖추고 있다.

-세이난스미야구라 (망루)
규모와 구조는 도난스미망루와 같으나 돌을 떨어뜨리는 '이시오토시'의 박공 형식이 다르다.

-오모테니노문
혼마루 남쪽에 위치해 철판이 물여져 있고 마름질을 두껍게 하여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양쪽 담은 흙으로 세웠다고 한다.

-명승 니노마루 정원
1615년-1623년의 니노마루어전 건축과 더불어 어전 북쪽에 만들어진 정원이다. 1716년-1736년 이후 빈번히 개수되어
회유식 정원으로 바뀌었다.

-나고야성 혼마루어전
나고야성 혼마루어전은 초대 오와리 번주의 주거 및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161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건립.
1930년에는 천수와 함꼐 국보로 지정되어 명건축응로 널리 알려졌으나 1945년의 공습에 의해 소실되었다.
2009년부터 복원공사가 개시되었으며 2018년에는 전체 공사가 완료될 예정이라 한다.

오사카 성

오사카 성 (일본어: 大坂城, おおざかじょう)은 셋쓰 국 히가시나리 군 오사카에 있었던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의 성이다. 다른 이름은 긴조 (金城) 혹은 긴조 (錦城)로, 과거에는 오사카(大坂)가 근대에 와서 오사카(大阪)로 표기하도록 개정되었기 때문에, 현재에는 오사카(大阪)라고 많이 표기하고 있다.
도요토미 정권의 본성으로 있었지만, 오사카 전투에서 소실되었다. 그리고 그 후 에도 시대에 재건을 해 에도 막부의 서일본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성이 있는 곳은 현재 오사카 시 주오 구의 오사카조 공원 (大阪城公園)이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도요토미 가문의 오사카 성
1583년 센고쿠 시대 이시야마 혼간지와 그 절안에 위치한 마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을 개시했다.
혼마루는 이시야마 혼간지터에 조성되었고, 천수는 옛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외관은 5층 5계이다. 그리고, 기와등에 금박을 입혀 화려하게 장식했다. 히데요시의 임종이 있기까지 니노마루, 산노마루에는 소가마에를 건설해 3중의 해자와 운하가 있는 견실한 성으로 완성되었다. 한창 오사카 성을 축성할 때 히데요시를 방문한 오토모 소린이 성 주위를 둘러보고는 "오사카 성은 삼국무쌍"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에도 시대
1603년 에도 막부가 성립된 후에도 히데요리는 오사카 성에 머물면서 셋쓰를 지배했고, 1614년 오사카 성 겨울전투에서 이에야스가 이끄는 군의 공격을 물리친다. 그리고, 소마에와 산노마루를 폐기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지만, 조건에 없는 니노마루의 외측 해자까지 메우게 되었다. 오사카 성은 내측 해자와 혼마루만 남는 벌거벗은 성이 되어 버렸다.
히데요리는 매워진 외측 해자를 다시 만들었기 때문에 강화는 파기되어 겨울전투로부터 4개월 후 1615년 오사카 여름전투에서 패배하게 된다. 이때 혼마루는 소실되고, 도요토미 가문은 멸문되었다. 그 뒤로도 오사카 성은 화재와 방화로 손실과 재건을 반복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신정부는 성내의 부지를 육군의 부지로 활용하고, 민간인의 출입을 금했다. 동쪽에는 국철 조토 선(현재의 오사카 순환선)까지의 거대한 지역에 병기공장을 지었고, 이 때문에 태평양 전쟁시 미군의 공격목표가 되었다.
현재 오사카와 오사카 성의 상징인 천수각은 1928년 당시 오사카 시장인 세키 하지메가 재건할 것을 주창해, 1931년 성을 준공했다. 1930년대 이후 각지에 건설된 복원천수 1호였다. 남아있는 건축물은 성내에는 오테 문, 엔쇼구라, 다몬 망루, 센간 망루, 이누이 망루, 이치반 망루, 로쿠반 망루, 가나구라, 사쿠라 문 등이 있고, 1997년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쿠마모토 성

일본 3대 명성의 하나로 꼽히는 쿠마모토 성은 가토 기요마사에 의해 1607년에 완성 되었다. 주위 5.3 킬로미터의 성내에 120여개의 우물을 팠고, 성루 49 개소, 성루문 18개소, 성문 29개소의 건조물이 존재하였으나, 1877년 세이난(西南)전쟁으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다. 현재의 천수각은 1960년에 재건된 것이다. 특이한 경사와 견고함으로 알려져 있는 쿠마모토성의 성벽은 '무샤가에시 武者返し(난공불락의 성벽이라는 의미)'로 불리고 있다.
안타깝게도 지난 4월에 발생한 쿠마모토 지진으로 인해 돌담이 최소 6곳이 무너졌고, 100m에 걸쳐 담장이 붕괴되었다.

축성 성주 가토 기요마사
쿠마모토성을 축성한 가토 기요마사(1562년~1611년)가 쿠마모토에 온 것은 27살 때였다. 지금의 아이치현(愛知県) 서부에 있는 오와리(尾張) 출신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7년~1598년)와는 어머니들이 사촌지간이라는 설도 있다.
쿠마모토에 온 기요마사는 당시 오랜 전란으로 황폐해져 있던 쿠마모토를 재건하기 위하여 치산치수(治山治水) 공사와 논밭 개발 등에 총력을 기울였고 그러한 공사 덕분에 당시의 시설들이 지금까지 이용되는 것도 있다. 또한, 남만무역(南蛮貿易)을 실시하는 등의 영지경영을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쿠마모토는 점점 풍요로워졌다. 그래서 쿠마모토 사람들은 가토 기요마사를 신처럼 모셨으며, 지금도 고장 사람들은 그를 세이쇼코산(せいしょこさん)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다.

쿠마모토 성주 호소카와 다다토시
호소카와 다다토시(1586년~1641년)는 쿠마모토 성주를 2대째 이어오던 가토(加藤) 가문이 형벌로 영지와 저택을 몰수당한 다음에 쿠마모토로 오게 되었다. 쿠마모토에 오기 전에는 부젠 고쿠라성(豊前小倉城)의 성주였다. 호소카와 가문은 오다 노부나가(小田信長・1534년~158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7년~1598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1543년~1616년)를 섬기며 전국시대를 살아 남아온 무사 가문이다.
호소카와 다다토시의 조부인 유사이(幽斎)는 당대 최고의 문화인으로써 이름을 남겼으며, 아버지 다다오키(忠興)는 다도의 명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센노 리큐(千利休・1522년~1591년)의 제자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혈육을 이어받아 다다토시는 문인인 동시에 무도에도 훌륭한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무사의 한사람인가토 기요마사(宮本武蔵・1584년~1645년)가 그의 만년을 쿠마모토에서 보냈던 것은 다다토시가 그를 손님으로 구마모토에 초대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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